216. 사숙후록 후서

  무경이 책상에 기대 앉아 하늘을 우러르며 후 하고 깊게 숨을 내쉬는데, 멍하니 자기의 몸을 잊은 것 같았다. 옆에서 지켜보던 자가 물었다.
  "당신은 이제 막 백 일 동안의 글을 마무리지었는데, 응당 기뻐해야 할 일이 아닌가? 그런데 어찌하여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앉아 있는 것인가?"
  무경이 말했다.
  "내가 백 일 동안 글을 쓰면서 물었던 것이 '나는 왜 이 글을 쓰는가'라는 질문이었다. 그런데 글을 다 쓰고 난 뒤 남은 것은 '내 자신이 보잘것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마음'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전하고자 하는 항상심'이었다. 아! 이 두 가지는 모두 나름의 가치를 가진 마음이겠으나, 정작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거기에 남아 있지 않았다."
  지켜보던 자가 웃으며 말했다.
  "그대는 참으로 어리석다. 그대가 글을 쓰면서 혹은 편협하게 주제를 고르기도 했고, 혹은 잡다한 생각만 던지고 말았으며, 혹은 자신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도 모르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과정 속에서 두 가지 마음이 남았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대는 혹 사금을 캐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지 못했는가? 그들은 강가에 나가 구멍이 난 체를 흔들며 가벼운 돌덩이를 흘려보낸다. 때로는 허탕을 치기도 하고, 때로는 과하게 욕심을 부리다가 체가 망가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게 체를 열심히 움직이고 난 뒤, 거기에 남은 작은 황금 조각이 남지 않는가? 그대가 백 일 동안 열심히 체질을 하였으니, 남은 마음 두 조각이 그대가 건져올린 금 조각이 아니겠는가?"
  무경이 무릎을 치며 말했다.
  "참으로 그러하다. 그러나 혹여나 내가 건져올린 이 생각 두 조각이 금으로 위장한 가짜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이제 내가 할 일은 더욱 생각을 정밀하게 하여 진정 순수한 금을 추출해내는 일과, 더욱 많은 금덩어리를 찾아내는 일이 아닐까 한다."
  무경은 말을 마치고 새로이 책을 펴서 읽기 시작했는데, 그 기세가 옆에서 벼락이 떨어져도 움직이지 않으려는 완고함이 보였다.
  아! 백 일 이후 또 다시 백 일을 하면서 무경은 자신의 이전 백 일이 얕았음을 발견했고, 지금의 백 일 역시도 언젠가는 얕은 지경이었음을 알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무경은 계속해서 끊임없이 위 질문을 하게 될 것이다. 이는 천하에 지극히 기쁜 일인가, 천하에 지극히 가여운 일인가?

by 무경 | 2012/01/07 01:24 | (사숙록) | 트랙백 | 덧글(0)

215. 100일 - 나의 모순

  우리가 바라는 리더십에는 '수식이 없는' 리더십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문제는 그 수식어가 서로 이율배반적인 수사들로 결합되면서 세상에는 존재하기 어려운 리더십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사실 대중의 정서는 갈피를 잡기 어려울 때가 많다. 변화를 요구하다가도 금방 변화를 두려워하거나 저항한다. 또 안정을 바라다가도 금방 그 안정에 싫증을 낸다. 대중들의 리더십에 대한 요구 역시 이러한 대중적 정서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Newman 1995;Kornhauser 1959). 이에 대해 송복(2000, 10)은 지도자와 리더십에 대해 지금까지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고 요구해 왔기 때문에 사람들이 바라고 학자들이 연구하는 지도자와 리더십은 거의 대부분 '양향적'(兩向的, ambivalent)인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에 의하면,

  '강력'하고도 '민주적'인 리더십, '도덕적'이면서도 '효율적'인 리더십, '창조적'이면서도 '적응적'인 리더십, '가치지향적'이면서도 '목표달성적'인 리더십, '지적'이면서도 '대중적'인 리더십, 혹은 '과감'하면서도 '포용적'인 리더십, '강인'하면서도 '유연'한 리더십-이런 리더십을 사람들은 으레 바라고 으레 생각한다. … 그러나 인간의 행동과 심정은 그같이 '양향적'이 될 수가 없다. '강력'하면 '민주적'이 되기 어렵고, '도덕적'이면 '효율적'이 되기 힘들다. '가치지향'과 '목표달성'은 다른 차원이며, '지적'인 것과 '대중적'인 것도 서로 다른 성향이다. '과감성'과 '포용성' 또한 겸비되기 어렵고, '강인성'과 '유연성'도 대개의 경우 병행되지 않는다. '결단'에 찬 사람은 대부분 '비순응적'이고, '용감한' 사람은 그만큼 '폭력'도 수반한다. '단호함'과 '부드러움'도 같이 서거나 동시성을 띠지 못한다(송복, 2000, 9-11).

  이러한 그의 지적은 리더십을 보는 데는 이상으로서 소망스런 리더십만 볼 것이 아니라, 리더십 현상을 현실로서 실제적이고 경험적인 차원에서 보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지도자의 리더십을 현실로서 있는 그대로만 보는 것도 문제일 수 있다. 만약 강력한 리더십이 독재로 발전할 경우 그것을 지도자의 타고난 행동과 심성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치부해 보리는 것은 우리들 스스로 지도자의 리더십의 중요성을 폄하하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주석 - 오늘날의 독재자도 혼자서 되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 혼란 속에서 독재자를 바라는 국민의 마음이 독재자를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의식의 선택이라기 보다는 '본의 아니게', '우연히', '나도 모르게' 무의식의 과정에 따라 결정된다. 그리고 왕왕 우리는 독재자를 '강력한 지도자'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강력한 지도자'를 바라는 마음 속에 독재에의 향수가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다(이부영 1992, 176).)

<현대 정치과정의 동학> 454~455쪽, 고경민, 인간사랑

  대중은 모순적인 존재이다. 대중은 지도자가 모든 것을 다 갖추었기를 바란다. 하지만 지도자는, 그가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 해도, 대중이 원하는 모든 것을 갖출 수는 없다. 대중은 강력한 지도자를 원한다. 하지만 그들은 독재자의 독재에 항거하고 저항하며 그를 바닥으로 끌어내릴 수도 있다. 대중은 열망하고, 그 열망은 지도자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대중은 그 지도자를 보며 그가 가진 특성 때문에 그들의 지도자가 되었다고 평가한다. 지도자가 잘못을 저지르면, 그것은 지도자의 품성과 능력의 결함 때문이며, 그를 지도자로 만든 대중의 탓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대중은 모순적인 존재이다. 우리의 삶이 언제나 모순으로 가득 차 있듯이.
  매일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생각을 정리하는 과정은 내 속에 잠든 모순을 발견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서로 충돌하는 다양한 가치가 아무 문제 없이 공존하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은 경악스럽기까지 했다. 결국 100일 동안의 또 한 번의 여정을 마무리지으며 남은 것은 한 가지 질문이다. '나는 왜 모순적인가?'

by 무경 | 2012/01/07 00:15 | (사숙록)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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