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1995년 시카고를 배경으로 이야기를 쓴다면, 독자가 떄와 장소와 정황에 대해 대체적으로 가늠하고 있다고 추정해도 무방하고, 약간의 힌트만으로 그림을 채울 수 있다. 하지만 이야기가 3295년 4-베타 드라코니스를 배경으로 펼쳐진다면 독자들은 무엇을 예상해야 할지 알 수 없다. 그 이야기의 세계는 창조되어야만 하고 이야기 안에서 설명되어야만 한다. 바로 이 점이 SF와 환상문학의 아름다움의 일부분이다. 작가와 독자가 상호협력해서 세계를 만들어나간다. 하지만 이는 까다로운 작업이다.
정보를 허술한 장치로 겨우 은폐하면서 강의하듯이 퍼부으면("오, 선장님, 반물질 디시뮬레이터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려주십시오!"), 그리고 정보를 이런 식으로만 계속 전달한다면, 작품은 SF 작가들 말마따나 '해설 덩어리'가 생긴다. 어떤 장르에서든 솜씨 있는 작가들은 해설 덩어리를 만들지 않는다. 정보를 부수고 곱게 갈아서 벽돌을 만들어 그걸로 스토리를 쌓아나간다.
서사문은 거의 모두 해설과 설명을 어느 정도는 전달한다. 이 해설이라는 화물은 SF에서 그렇듯이 회고록에서도 큰 문제가 될 수 있다. 정보를 이야기의 일부분으로 포함하는 기술은 습득 가능하다. 언제나 그렇듯이, 좋은 해결책은 단순히 거기에 문제가 있음을 인식하는 데에서 나온다.<글쓰기의 항해술> 151~152쪽, 어슐러 K. 르귄, 황금가지
무언가를 제대로 이야기하려면, 때로는 이야기의 흐름을 끊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하는 경우가 생긴다. 이야기를 앞으로 이끌 추진력을 얻기 위해서 배경을 설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교과서를 생각해 보자. 교과서에서 새로운 개념을 설명하는 부분과, 그 개념이 어떻게 활용되고 다른 개념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설명하는 부분은 (그것이 보이게 드러나 있건 그렇지 않건) 공존하고 있다.
여기서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방식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가령 내가 남에게 '커피 추출 방식'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고 가정하자. 어떤 사람은 '추출'이라는 개념을 정확히 알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나는 커피의 추출이라는 것은 커피 원두를 가공하여 커피라는 음료를 만드는 과정이라는 점부터 이야기해야 한다. 하지만 바리스타에게는 곧장 '융 드립이 과연 어느 정도로 커피의 맛을 추출해 낼 수 있는가'에 대한 전문적인 논의가 가능할 것이다. 요점은, 내가 대화를 하는 상대방이 어느 정도를 알고 있는가를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거기에서 내 대화에서 설명하는 부분과 이야기를 진행하는 부분의 비중을 조절할 수 있다. 소설에서 (소설만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무언가를 전달하려고 하는 모든 시도에서) 독자(혹은 시청자)가 누구인지가 명확할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가 여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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