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3. 43일 - 단순하게 편가르기 (사숙록)

  이러한 묵시론적 비전은 기독교를 신봉하지 않는 일반 서구인들까지도 인류의 역사를 악의 세력에 대항하는 선의 세력이 승리해가는 도덕적 역사(moral history)로 간주하도록 만들었다. 사탄을 나로부터 소외시키는 모든 사유는 유일신론(monotheism)의 근본적 논리를 위배하는 이단적 사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성향은 로마카톨릭이나 프로테스탄트나, 에반젤리칼이나 오쏘독스를 막론하고 근대세계에 있어서 강렬한 모우멘텀을 더해가기만 하였고, 오늘날 무슬림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는 서구인들의 사유에까지 계승되고 있는 것이다. 칼 맑스와 같은 사상가의 역사인식도 결국 이러한 "대사탄전쟁"이라고 하는 묵시론적 세계관의 세속적 형태일 뿐이다.

  결국 나의 신념과 일치하지 않는 주변 사람들을 모두 '사탄'으로 규정하는 가치체계가 이 세계를 계속 미궁 속으로 계속 빠뜨리고만 있다. 어찌할꼬! 어찌할꼬! 선인이나 악인이나 모두 나의 스승이라는, 이토록 평범한 공자의 한마디가 반만년 인류의 종교적 사유의 모든 죄악을 일소시킬 수도 있다는 것을 서구적 사유에 중독된 그 누구가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인가!

<논어한글역주 2> 591쪽, 김용옥. 통나무

  논어 술이편에 나오는 '세 사람이 길을 가도 반드시 자신의 스승이 있다'는 구절에 대한 해석을 하면서, 위 글은 서양 기독교 문명에서의 선과 악의 대결 구도가 서양의 사유에 어떠한 영향력을 미쳤는지에 대해 한탄조로 이야기하고 있다.
  생각해 보면, 논어 속 이 구절의 말마따나 선한 사람의 모습을 보면서 그 선함을 따르고, 선하지 않은 사람은 그 모습을 보면서 자신을 반성하고 고치는 계기로 삼는 것으로 충분하다. 하지만 이 구절에서는 자신의 수양을 넘어서 다른 이를 '교정하는' 것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선하지 않은 사람을 질책하고 선한 행위를 하도록 '강제하는' 것은 그 사람을 스승 삼는, 다시 말해 가르침을 얻는 모습이 아니다. 사실 잘 생각해 보면, 자신이 옳고 상대방이 그른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르고 상대방이 옳을 수도 있는 것이다. 단지 자신이 자신의 옳고 그름을 잘못 알고 있다면,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렇기에 항상 상대의 모습을 보고 내 모습을 그에 견주면서 계속 점검하고 고치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내가 옳을 때 그 옳음을 상대방에게 강요하는 모습도 문제인데, 하물며 자신이 옳지 않다면 그것을 옳다 믿고 강요하는 것은 더욱 더 큰 문제가 아니겠는가?
  사실 나는 아직도 절대선과 절대악이 존재하는지에 대해서 전혀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자신이 절대적인 선이라고 하면서 자신과 생각이 다른 이를 악이라고 규정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 심각한 문제점이나 골칫거리, 나아가서는 '악'이라고 생각한다. 종교와 이념과 사상에서 이러한 이기적인 생각이 최근 점점 당당하게 고개들고 세상 속을 활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을 갖고 있다. 뭐, 어쩌면 이렇게 생각하는 내가 잘못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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