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9. 69일 - 정말 잘 하셨습니다! (사숙록)

  나는 그들에게 영화 줄거리를 이야기했다네. 우주의 끝에 갔다가 과거의 시간으로 떠내려가서 인류가 처음 출현한 홍적세 시대에 다다른다는 내용이었어. 나는 포유동물이 아직 번성하지 못했던 지구상에서 파충류 생물이 지배적인 생명체로 진화했을지도 모르는 또 다른 차원의 진화 과정을 가정했지. 뱀이 지배적인 생명체로 군림하는 먼 은하계에서 온 외계 지성인을 가정했고, 스타 트렉의 미래 시대의 지구를 찾아온 그 뱀 생물체는 자기들 조상이 완전히 말살된 것을 목격하고는, 시간의 흐름을 왜곡시켜 파충류가 인류를 격퇴할 수 있게 하려고 지구의 아주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거야. 엔터프라이즈호는 시간을 바로잡으러 과거로 가서 뱀 외계인을 발견하고, 인간 승무원들은 우리의 현재와 미래에서 그 나름의 세력권을 확보하려는 어떠한 생물 형태 전부를 말살시키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 도덕적 딜레마에 직면하게 되지. 요컨대 그 이야기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문제의식을 가지고서 모든 시간과 모든 공간을 총망라했던 거라네.
  트래불러스는 이 말을 다 듣고 몇 분 동안 조용히 앉아 있더군. 그러고 나서 그가 말했네. '글쎄, 나는 폰 데니켄이라는 사람이 쓴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 사람은 마야인의 달력이 우리들의 달력과 정확히 닮았기 때문에 마야인 달력은 틀림없이 외계인에게서 전수 받은 게 분명하다는 사실을 증명했더군요. 마야인 이야기도 영화에 집어넣으면 좋겠는데요?'
  나는 진을 쳐다봤다. 진도 나를 쳐다봤고, 그는 아무 말이 없더군. 그래서 나는 트래불러스를 바라보고 말했어. '시간의 여명기에는 마야인이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어요.' 그러자 그가 말했지. '허 참, 그런 오류를 어느 누가 신경이나 쓴다고 그래요?' 그래서 내가 말했지. '그런 오류는 내가 신경 씁니다. 당신이 내놓은 건 멍청한 제안이라고요.' 그랬더니 트래불러스는 무척 열 받아서, 자기는 마야인을 너무나 좋아하니까 이 영화의 각본을 쓰고 싶으면 그냥 자기 의견대로 하라고 말하더군. 그래서 내가 말했지. '작가는 나야. 내가 너 같은 병신 따위 알 게 뭐야!' 그러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어. 그리고 그걸로 스타 트렉 영화와 나의 인연은 끝이 났지 뭐."
  그 일화는 꼭 필요한 때에 꼭 필요한 말을 차마 하지 못하는 우리 같은 연약한 작가들에게 다른 말 필요 없이 그저 이 말만 튀어나오게 한다. "정말 잘 하셨습니다, 할란 선생님!"

<죽음의 무도> 609쪽, 스티븐 킹, 황금가지

  스티븐 킹이 기나긴 각주로 달아가면서까지 전한 할란 엘리슨의 이야기는 무척 재미있으면서도 복잡한 심경을 준다. 할란 엘리슨의 매력적인 제안이 어떤 멍청한 윗사람의 사이비 지식 때문에 망쳐지고 더럽혀질 위기에 처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는 상당히 익숙한 풍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할란 엘리슨이 강단 있는 사람이어서 어리석은 윗사람의 제안을 거부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각본은 이상한 상상 설정(차마 유사과학이라는 단어를 붙이지도 못하겠다)을 현실인 양 들이미는 물건이 될 것이고, 각본가 본인은 좌절한 채로 쓰는둥마는둥 각본을 썼을 것이다.
  이 이야기 속에서 다양한 현실의 모습들이 비춰지는 듯 하다. 이상한 믿음 혹은 공상(혹은 망상?)을 진실인 양 이야기하면서 현실 세계에 섞으려고 하는 '틀뢴주의자들'(이 용어는 보르헤스의 선구적인 소설에서 내가 따온 개인적 용어이다)의 모습과, 파킨슨의 법칙으로 알려진 무능한 윗사람 문제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들, 창작의 여러 어려움 중 독자의 요구에 맞서 작가가 자신의 창작물을 어디까지 지켜낼 수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 등이 이 글 속에서 보인다. 하지만 결국 이 이야기의 끝은 어리석은 자의 바보 같은 생각이 행해지려는 것이, 현명하고 용기 있는 사람의 강단에 의해 저지된 나름대로 해피엔딩이라고 생각한다. 나 역시도 이 말을 꼭 하고 싶다. "정말 잘 하셨습니다!"


덧글

  • shaind 2013/10/08 12:02 # 답글

    '이상한 생각', 'crank'에 심취한 윗사람이 실무자들을 엿먹이는 건 고금불변의 현상이죠. 노무현 때의 대북/대미외교같은 경우도 있고, 이명박의 '한반도대운하'도 전형적인 crank였죠. 후자는 결국 4대강이라는 현실적인 레벨로 타협당해서 그나마 다행이었습니다만...
  • 무경 2013/10/09 12:39 #

    이 블로그에 덧글 남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언급하신 현상에 대해서는 '보이지 않는 고릴라'라는 책에서 흥미로운 사례가 나와 있더군요. 러시아와 체첸 사이의 전쟁에서, 체첸 쪽의 고위직 인물들이 어떻게 이상한 생각을 자기 확신으로 만들었는가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생각해 볼 거리가 많은 주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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